#. 신길역. 오전 8:34.
평소의 출근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각.
헤드폰을 뒤집어 쓰고 사람들의 소리를 내 귀로부터 차단한 채,
여느때보다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5호선 플랫폼을 향한 계단에 발을 옮기고 있었다.
쿡. 하고.
누군가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건드린 느낌이 났다.
돌아보았다.
일견 평범한 외모의 착한 눈빛을 가진 아가씨.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외모와, 얼굴과, 눈빛이었다.
실수로 부딪혔거니.. 생각하고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등을 돌렸다.
쿡.
그녀는 다시금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건드렸다.
돌아보자, 이번에는 뭐라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헤드폰을 벗었다.
'수겸이 아냐? 정보고 졸업한..'
순간 당황과 미안함. 이란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서야 '맞는데..'라고 말끝을 흐려 대답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몇번이나 찬찬히 들여다보아도, 역시 모르는 얼굴이었다.
뭐, 그렇기는 해도.
그녀도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닌듯했다.
과도 잘못 알고 있었을 뿐더러, 기억도 정확하진 않았고.
그나마 그녀 스스로가 내게 말을 걸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건,
1학년때 학급위원 일로 가끔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던 듯 했다.
(난 반장이었고, 그녀는 다른 반의 부반장이었더랬다)
물론 난 그마저도 까마득하게 멀기만 한 일이었다.
지나가며 몇번 보기는 했었지만 오늘에야 말을 걸었다고, 그렇게 얘기했다.
기껏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준 사람에게 미안하게도,
까마득히 먼 - 그리고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의 나도, 그녀도. .#
#. 회사로 향하는 5호선 전철 안에서
오래간만에 고교시절의 기억들을 잠시 떠올렸다.
불안. 고집. 기쁨. 독선. 슬픔. 경쟁. 호감. 경멸. 낙담.
감정들이 뒤섞인 기억의 실타래 속에서 한참 길을 잃고 헤메었다.
어차피... 내가 스스로 끊어버린 것들인데.
습관처럼,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려. 그랬던건데. .#
...
#. 항상 난 소년으로 남을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곳에 가더라도, 무슨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전의 기억은 모두 잊은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고.
어디에서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어디에서나 항상 서투른 채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 믿었다.
언제나. 언제나.
내게 있어서 기억이라는 존재는 지워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
#. 결국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전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있는 채로는
내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만 변해가는 일.
이를테면 버려진 동물의 시체가 썩어 이내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그런 종류의 변해가는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결국 꽃이 피어난다라는 식의 - 그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나 자신으로는 멋진 사람 따위는 될 수 없을거라고.
그래서 지나온 것을 버리고, 지우고, 잊어버리고,
계속 뭔가를 쌓아가는 일에만 집중해왔던 것 같다. .#
...
#. 슬픈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침의 그녀는
내 예전의 기억 속에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하루를 시작한다. .# keni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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