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모든게 거짓처럼 여겨졌던 때에, 너만이 내 삶의 진실에 닿아 있다.
그렇게 믿었던 때가 있었어.

그래서 행복할 수 없었던 난 행복하지 않아도 되었어.
네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니 최소한, 내가 찾고 싶었던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고,
조금이라도 내 키를 높여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았어.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는지.
네게는 또 얼마나 잔인한 생각이었는지.

행복을 연기하는 사람 옆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리가 없는데.

또 우물을 파기 시작하는 마음.

한 우물을 파자 (응?)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행복해보이지 않는걸까.

내가 무엇인가를 해 주기 위해서 다가가는 것 조차도
때로는 좁은 방구석에 숨어들어야 마음놓고 숨을 쉴 수 있는
그런 사람의 어깨를 잡아채는 행동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네 어깨는 그렇게도 힘이 없어 보였을까.
그래서 네 눈가의 표정은 그저 굳어만 있었던걸까.
그래서 네 시선은 내 얼굴의 너머 어딘가에 고정되었던걸까.

손을 잡고 싶었지만

무서워.

다만 지켜볼 자유조차도 빼앗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한 마디의 말을 더 들어주고 싶었고
네 웅얼거림같은 말투의 호흡이 잠시 멈춘 사이 내 반응을 살피려 고개를 들었을 때
네 머리카락을 한가득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쓰다듬어주고 싶었어.

쑥스러운 미소를 짓게 되더라도.
천천히 굳어지는 입가의 표정과 가늘게 뜬 눈가의 주름을 보게 되더라도.

혹은 모든게 상상과 착각의 경계에서 시작되고 끝나버려
왜곡된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게 되더라도.

이렇게 망가질 줄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제로 또 겪어보니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

뭔가 정신없이 시작되는 11월의 첫째날.

새 노트북을 사든. 새 음악을 듣든. 새 옷을 걸치고 거리에 나가든. 새 애인을 사귀든.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어.

스스로가 변하지 않으면. 결국 또 반복할 뿐이야.

다시 새 노트북을 사야 하고
다시 새 음악을 찾아 헤매야 하고
다시 새 옷을 골라야 하고
다시 새 관계를 시작해야 하고

똑같은 함정에 빠질 뿐이야.

그게 소비의 연쇄에 빠진 현대인의 삶일 뿐이야.
단지 소비하는 것만이 미덕이고
소비를 위한 가치창조에 모든 것을 내던지라는 시스템의 가르침.

조그만 우물 안에서 무엇 하나 작은거라도 꾸준히 만들며 살아온 사람들은.
넓디넓은 세상에서 거대한 시스템의 1비트짜리 플립플롭이 되고 말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