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나는 지금 mcp(Microsoft Certified Professional, Microsoft사의 자사 제품에 대한 자격 인증 시험)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다. 시험 결과는 합격. 점수가 700점을 넘어야 합격인데 내 점수는 정확히 700점이었다. 쉽지 않았던걸까. 영어로 된 문제는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머리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고, 그 전날 잠을 조금 자고 시험을 친 까닭인지 머리가 멍하다. 시험의 이미지는 멍한 그 상태로 떠 다녀서 그 난이도란게 어떤건지조차 알기가 힘들다. 멍하게 퍼져나가는 담배연기에 난이도 따위는 없는 것처럼.

왜 이 시험을 봐야 했는지 이유를 생각했다. 분명 어떤 자격 때문이었다. 아. 강사. 이 시험은 내가 나중에 강사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절차들 중 하나였다. 강사.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내 머리를 열어 일련의 지식을 꺼내고, 그것을 텍스트와 이미지와 나의 언변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누군가의 눈과 귀로 입력하고, 최종적으로 나의 지식(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게 '나의 지식'이란 표현을 쓸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과 누군가의 지식을 동기화시키는 일.

처음으로 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분명 '가르치는 일이 즐거워'라든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와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다.

아마도 여행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체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쳐야 여행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사라는 직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걸까. 머리 속의 단어끼리 연결이 엉킨 것만 같다. 어두운 색 정장에는 검은 양말. 내 머리 속의 여행과 강사는 검은색의 정장 바지와 흰 양말의 하모니처럼 흔들린다.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출발점을 잃고 부유하는 목표들. 그리고 마구 어질러진 책상 위의 서류같은 오늘의 할 일. 전철 안에서 떠밀려 회사로 향하고, 회사에서 일에 떠밀려 컴퓨터 디스플레이에 시선을 두고, 방향을 잃은 본능같은 감각은 단지 뇌에 일정한 자극을 주는 텍스트와 이미지로 디스플레이의 픽셀 하나하나에 나의 의식을 떠밀고. 끈이 풀린 부표처럼 파도에 떠밀려 어디론가로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아야.

손에 힘을 주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어지지 않는 생각의 가닥을 붙잡듯이. 하지만 생각은 미끈거리는 물고기의 외피마냥 움켜쥔 손을 빠져나간다.

여행. 확실히 목표는 여행이었어. 강사가 아니라. 그리고 음악. 하늘. 구름. 자전거. 경비행기. 방학. 그때서야 강사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대학 교수였어. 맞아. 손대기도 어려운 문제를 어디선가 잔뜩 들고 와서는 학생들을 괴롭히면서 싱글거리는 스타일의 그런 교수. 방학이 되면 늘 어딘가로 사라져버려서 학기말에 학점이 발표되고 나면 연락조차 안 되고, 그 다음 학기의 첫 수업에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쓰고서는 호치민 얘기로 강의를 시작한다던가, 아니면 하노이 탑 얘기를 꺼내겠지. 이번 수업의 첫 과제는 하노이 탑 알고리즘이에요.

그리고 음악. 가장 더운 때와 가장 추운 때에 집 어딘가에 숨어있을 방을 만들고, 곡을 쓰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어딘가의 대륙에서 경비행기로 시선이 닿는 사방의 끝이 지평선인 하늘을 날고. 180km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 기진맥진한 날의 밤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어지러운 잠에 빠지고.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단편적인 생각과 이미지와 단어의 모임뿐이었던 - 그리고 아마도 현실을 견디기 위해 꾸며내야만 했던 - 것들을 조금 더 다듬어야만 한다. 아니, 단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목표. 성취해야 할 것들. 내가 해내지 못한다면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들. 내가 나에게 존재의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 그 어떤 것을.

그 시작의 끝에서 어지러운 잠에 다시금 빠져들 때, 이루지 못한 것에 억울해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의 영혼 속에 빛이 있다고 믿는다면.

게으름은 분명 만인에 대한 죄악이다.

나는 현실에 있어.

이쯤되면 정신고문관이 등장해주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전기쓰레빠 엉어와 저녁을 먹으러 고기부페집에 갔었더랬다.
(원래 케냘은 고기부페 안 가지만 이 동네는 이상하게 고기부페집이 고기 상태가 제일 양호하다)
자리에 앉아서 고기주삼.. 아 술은 뭘로?.. 그냥 사이다나 주세요.. 라고 주문 프로세스를 이어갔는데,

갑자기 주인이 정색을 하며 이러는거다.
'우리는 고기집이 아니라 실내포장마차라서 술 없이는 고기를 안 팝니다'

네?
아니 그러니까 사이다 주문했잖아요... 가 아니라.

술 주문을 안하면 쫓아낼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참이슬 한 병을 주문했고,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송이가 떡가루마냥 흩날리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케냘의 가방에는 참이슬병 주둥이가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

아 뭐 고기는 먹었으니까 슬픈 이야기는 아닌가.

잊을 수도 없겠도다 제물포역 뒷골목 '미친 구이' (가게 이름마저 완전 곤조가게야;)

고마워요. 망각의 저편에 서 있는 사람.

커피를 몇 잔째 마시는건지 모르겠다.
짜증이 돋아서 막 씨발거리며 토할 것 같은 기분.
오래간만이다.

그래.. 슬슬 긴장할 때도 되긴 했지.

뭐가 문제인지도.

어디부터 사고가 멈추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차리자.

추해. 정말.

내 인생은 왜 이다지도 끝없는 반복뿐인가.

새벽부터 난데없이 햄버거가 땡기는 건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새해에는 복 조낸 받는거다.